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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단위의 세계 – ‘큐비트’, ‘베르스타’, ‘냥’ 등 사라진 단위들

둔딩 2025. 5. 20. 20:03

우리는 일상에서 미터, 킬로그램, 초와 같은 국제 표준 단위에 익숙합니다. 오늘은 잊혀진 단위의 세계- 사라진 단위들을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잊혀진 단위의 세계 – ‘큐비트’, ‘베르스타’, ‘냥’ 등 사라진 단위들
잊혀진 단위의 세계 – ‘큐비트’, ‘베르스타’, ‘냥’ 등 사라진 단위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단위들은 아주 최근의 발명품에 가깝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쌓아온 수천 년 동안, 측정과 계산을 위한 다양한 단위들이 존재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위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문화와 사고방식, 권력과 기술 수준의 집약체였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한때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구성했던 독특한 단위들의 세계로 함께 떠나봅시다.

 

몸에서 시작된 단위들 – ‘큐비트’, ‘피트’, ‘한 뼘’의 시대


고대 문명에서 단위란 지금처럼 표준화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측정은 인간의 신체를 기준으로 했고, 그 기준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달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큐비트(cubit)입니다.

큐비트는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이스라엘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약 45cm 정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시대와 왕조, 계급에 따라 달랐습니다. 파라오 전용 ‘왕실 큐비트’는 평민의 큐비트보다 더 길었습니다. 단위에조차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셈이죠.

피트(feet) 역시 신체에서 유래한 단위입니다. 1피트는 성인의 발 길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나 유럽 각지에서 약간씩 다르게 정의되었습니다. 현대의 1피트(30.48cm)는 영국 왕 헨리 1세의 발 길이에 근거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 뼘(span)은 두 손가락을 벌렸을 때의 너비, 팔 길이(fathom)는 양팔을 쭉 벌렸을 때의 길이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이처럼 몸을 기준으로 한 단위는 직관적이지만, 당연히 표준화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위들은 단순한 기술 부족의 결과가 아니라, 몸과 세상을 연결해 이해하려는 고대인의 방식이자 문화의 일부였습니다.

 

제국과 시대가 만든 단위들 – ‘베르스타’, ‘리’, ‘도리’, ‘냥’의 문화적 정체성


단위는 단순히 측정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가, 제국, 왕조의 영향 아래에서 단위는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통일과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베르스타(верста)는 러시아 제국에서 사용된 거리 단위입니다. 1 베르스타는 약 1.06킬로미터로, 러시아 광대한 영토에서 이동 거리와 도로 건설의 기본 단위로 쓰였습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미터법 채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리(里)는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거리 단위입니다. 시대에 따라 길이가 달랐지만, 조선 시대에는 약 392.7m로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지명이나 거리 표현에 흔적이 남아 있죠(예: 10리길).

도리는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무게 단위입니다.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지역마다 도리의 기준이 달랐고, 곡물 거래 등에서 주로 쓰였습니다.

냥(兩)은 동아시아에서 무게를 재는 단위로, 약 37.5g~40g에 해당합니다. 은이나 금의 무게를 잴 때 자주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중국의 전통 약재 시장에서는 여전히 ‘량’이라는 단위를 쓰는 곳이 있습니다.

이들 단위는 단순한 기술적 도구를 넘어서 각 문명의 역사와 경제 시스템, 문화 감각이 녹아든 표현 수단이었습니다. 단위는 숫자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이었던 셈입니다.

 

단위의 세계화와 ‘표준화’가 만든 잃어버린 다양성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법(SI 단위계)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이상에 따라, 지구 자오선의 길이를 기준으로 1미터가 정의되었고, 이후 미터법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물론 표준화는 많은 장점을 줬습니다. 국제적 무역, 과학적 연구, 공학적 정밀성 등 현대 사회의 근간은 통일된 단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 고유의 단위 체계를 잃었습니다. 단위가 표준화되면서 측정 방식의 다양성, 지역적 정체성, 문화적 색채가 사라졌습니다. 다양한 ‘단위의 언어’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단 몇 개의 숫자와 기호만이 남아 우리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는 지금, 오히려 ‘단위’라는 개념은 너무 익숙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위는 단지 측정의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일부입니다. 잊혀진 단위들을 통해 우리는 단위의 문화성과 상대성을 다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단위들을 떠올리는 일은 단지 과거의 향수를 되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표준화된 숫자’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입니다.

단위는 측정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가 세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입니다. 단위 하나에도 문화가 담겨 있고, 시대의 가치관이 스며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들 단위는 과거 인간의 삶과 상상력, 그리고 고유한 세계관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물어야 합니다. 지금 사용하는 단위들이 정말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지배적 관점일 뿐인지를요.